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 나오토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, 학창 시절 === * [[1946년]] [[10월 10일]] 일본 [[야마구치현]] [[우베시]]에서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. * 1965년 [[도쿄공업대학]] 이학부 응용물리학과(현 물리학과)에 입학. 당시 대학의 자치회[* 한국으로 치면 [[학생회]].]에 들어가 있던 [[중핵파]]와 대립하고 나서 '''"이데올로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. 현실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."'''라며 15명 정도의 학생들을 모아 "전학개혁 추진회의"를 세워 [[극좌]] 계열과는 다른 학생운동을 시작했다. 이 조직은 첨예화되고 있던 [[전공투]]나 [[일본 공산당]]의 지배 하에 있던 민청과도 달랐고, 학교에 친화적인 '체제 찬성파' 그룹도 아니었던 제4의 그룹이었다고 한다.[* 참고로 이 조직은 20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고 한다.] 당시 경시청 경비과장을 지낸 삿사 아츠유키[* 훗날 내각 안보실장을 지낸다.]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, 당시 간 나오토는 [[논 섹트 래디컬]] 그룹에 속해 있었고, 학원분쟁 당시 자신이 기동대와 함께 도쿄공업대학에 출동했을 때 본 적이 있다고 한다. 간 나오토는 당시 "4번째 열의 사람"이었고, 아지[* Agitation의 줄임말. 말 자체는 선동을 의미하지만 선동을 위한 구호나 문장을 뜻하기도 한다. 한국의 [[운동권]]들도 아지라는 단어를 쓴다. 나무위키에서 아지를 찾아볼 수 있는 문서는 [[인터내셔널가#s-5]]를 참조할 것.]를 포함한 연설로 청중을 모으는 데에는 뛰어났지만, [[각목]]을 들고 검거를 각오하고 데모대를 돌진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. 삿사는 그를 "성공적인 리더였다"고 평가했다. * 학원분쟁으로 인해 졸업논문 작성이 어렵게 되자, 제대로 연구해서 논문을 내고 싶다고 자진해서 1년 유급했다고 한다. * 1970년 도쿄공업대학 졸업 이후 [[변리사]]로 일하면서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